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분절된 세계 질서를 논하던 스위스 다보스의 설경 속에서, 한 한국인 경영자가 우리의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10조 원(74억 달러) 규모의 거대한 베팅을 조용히 공개했다. 바로 "고려아연이 미국에 종합 제련소를 짓는다"는 소식이다.
이는 단순한 공장 건설을 넘어선다. 급변하는 세계 경제와 안보 지형 속에서 한 기업의 생존 전략이 어떻게 국가의 미래와 맞물리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다. 최근 다보스 포럼에서 진행된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 거대한 프로젝트 뒤에 숨겨진, 기업 전략의 교본과도 같은 5가지 놀라운 사실을 깊이 파헤쳐 본다.


1. ‘가격'이 전부였던 시대의 종말: 이제는 ‘안보’의 논리
이 거대한 투자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스프레드시트가 아닌, 이제 전 세계의 전쟁 지휘실과 기업 이사회를 맴도는 하나의 서늘한 질문 속에 있다.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비즈니스의 제1원칙은 '가격'이었다. 돈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더 저렴한 원자재와 부품을 찾아 전 세계를 누비는 것이 합리적인 경제 논리였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글로벌 물류망을 마비시키고 미중 무역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 견고했던 믿음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돈이 있어도 핵심 자원을 구하지 못하는 악몽이 현실이 된 것이다.
최윤범 회장은 당시 한 정부 관계자로부터 들었던 충격적인 질문을 전했다.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면 과연 우리 전투기가 뜰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꿨다. 핵심 광물과 소재는 더 이상 단순한 경제재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안보 자산'이 되었다. 경제 논리가 안보 논리에 자리를 내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 이것이 바로 고려아연의 10조 원짜리 베팅이 시작된 시대적 배경이다.



2. 고려아연은 ‘아연’만 만들지 않는다
'고려아연'이라는 이름은 이 회사의 진정한 가치를 가리는 영리한 위장막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이름 그대로 아연만 생산하는 기업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 상상을 압도한다.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는 아연, 연(납), 동(구리)을 포함해 총 20가지가 넘는 금속을 생산하는 거대한 금속 복합단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금속들 중 무려 13가지가 미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위해 지정한 '핵심 광물(Critical Minerals)'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미국 테네시에 건설될 공장 역시 단순히 아연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이 중 11가지의 핵심 광물을 생산하게 될 종합 제련소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 국방부가 왜 수많은 후보들을 제치고 고려아연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결정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당시 미국 정부에는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제 막 광산을 파보겠다는 '주니어 마이너(Junior Miner)'나,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을 내세운 '벤처' 기업들이었다.
반면 고려아연은 달랐다. 51년간 광산 하나 없이 오직 기술력과 효율성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은 기업, 그리고 당장이라도 미국 관계자들이 방문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수익의 온산제련소라는 '작동하는 청사진'을 가진 파트너였다. 미국 입장에서 이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투기적 베팅이 아니었다. 반세기 동안 검증된 기술력과 수익 모델을 가진 파트너와 함께 자국 핵심 광물 공급망의 리스크를 제거하는, 가장 확실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3. 더 비싼 미국 공장이 더 높은 수익성을 내는 비결: ‘마스터피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한국보다 건설비가 2~3배나 더 든다. 그럼에도 고려아연은 이 신규 공장이 기존 온산제련소보다 훨씬 높은 수익성을 낼 것이라 자신한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가능할까?
비밀은 '유기적 성장'과 '의도된 설계'의 차이에 있다. 51년 역사의 온산제련소는 강력하지만, 필요에 따라 조금씩 증축을 거듭하며 성장해 온 거대하고 복잡한 유기체와 같다. 그 결과 현재 아연 생산을 위해 4개의 배소 공장과 4개의 황산 공장이 각기 운영되는 비효율적인 구조를 안고 있다.
반면 테네시 신규 공장은 '깨끗한 백지' 위에 지난 51년간 축적된 모든 기술과 노하우를 집약해 설계하는 '마스터피스' 프로젝트다. 온산의 절반 규모임에도, 각각 단 하나의 공장으로 모든 공정을 처리할 수 있다. 이는 인력, 관리, 수선 등 모든 운영 비용의 극적인 감소를 의미한다. 최 회장은 이를 아주 간단한 예시로 설명한다. "100미터짜리 파이프라인을 수선하고 관리하는 비용은 10미터짜리 파이프의 열 배입니다." 이 압도적인 운영 효율성이야말로, 높은 초기 투자비를 상쇄하고도 남을 수익성을 만들어내는 핵심 비결이다.



4. 미국의 숙련공 부족 문제? 해답은 바로 ‘옆 공장’에 있었다
미국에 진출하는 제조업체들이 공통으로 부딪히는 가장 큰 장벽은 숙련된 인력 확보다. 최 회장은 "새로 뽑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첫 교육이 ‘아연이란 무엇인가?’가 되면 정말 암담한 상황"이라며 농담 섞인 우려를 표했다. 고려아연은 이 고질적인 문제를 거의 예술에 가까운 묘수로 풀어냈다.
해답은 부지 선정에 있었다. 고려아연이 택한 테네시주 클락스빌에는 약 50년간 운영되어 온 기존 아연 제련소가 있었다. 낡고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제련업을 이해하는 1,000명에 달하는 산업 인력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관련 커뮤니티가 존재했다.
고려아연의 전략은 실로 기막히다. 기존 공장 바로 옆에 신규 공장을 짓는 3년 동안 낡은 공장을 계속 가동한다. 그리고 그곳 직원들을 자연스럽게 교육하고 훈련시켜 새 공장이 완공되는 순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새로운 현장에 즉시 투입하는 것이다. 이는 인력 확보의 리스크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동시에, 지역 사회의 고용을 승계하며 상생하는 효과까지 거두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


5. 광산이 아닌 ‘전자 스크랩’에서 구리를 캐는 이유
고려아연이 생산하는 동(구리)은 100% 재활용 원료에서 나온다. 광산에서 캐낸 광석이 아니라, 우리가 버린 폐서버나 스마트폰 같은 '전자 스크랩'이 그들의 구리 광산이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환경적 명분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한다. 광석을 사 오는 것보다 폐전자제품에서 구리를 추출하는 것이 원가 면에서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재활용 원료에는 구리뿐만 아니라 금, 은과 같은 훨씬 가치 있는 귀금속들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어 추가적인 수익 창출로 이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재활용이 아니다. 지정학적 변수에 따라 공급이 불안정한 광산에 의존하는 대신, 자국 내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폐기물에서 핵심 자원을 추출해내는 안전하고 영구적인 '도시 광산(Urban Mine)'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핵심 공급망을 외부의 변수로부터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전략 중 하나다.


결론: 미래를 향한 담대한 베팅
고려아연의 미국 투자는 단순한 사업 확장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올라타는 '퀀텀 리프(Quantum Leap)'다. 최 회장은 이 프로젝트를 두고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잘못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 같은 건 없습니다. 그야말로 외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엄청난 확신과 비장함이 담겨 있다.
가격이 유일한 왕이었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세계는 안보와 신뢰라는 새로운 규칙으로 움직인다. 고려아연은 10조 원을 베팅하며, 그 새로운 질서의 중심에서 미국 산업의 미래를 떠받치는 반석이 되고자 한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향한 도약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법칙을 정확히 읽어낸 자들의 계산된 점프다. 이 담대한 도전이 그려낼 미래를 주목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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