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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의 주권: 바이킹 시대부터 현대 지정학까지의 역사적 변천사

by Heedong-Kim 2026. 1. 18.

서론: 지정학적 딜레마 속의 그린란드

그린란드의 역사는 ‘지정학적 결정론’의 냉엄한 사례를 보여준다. 한 땅의 운명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의지가 아닌, 세계 지도상에서의 전략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현상 말이다. 지리적으로는 북미 대륙의 일부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유럽 열강의 손아귀에 놓였던 이 거대한 섬은, 외부 세력들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가장 중요한 말(pawn) 중 하나였다.
 
본 해설서는 바이킹의 신화적 발견에서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 전쟁의 의도치 않은 결과, 그리고 냉전 시대 강대국들의 전략적 계산에 이르기까지, 그린란드의 주권이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변모해 왔는지 그 궤적을 심층적으로 추적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린란드가 오늘날 마주한 자결권을 향한 복잡한 투쟁의 역사적 뿌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름에 얽힌 기만과 얼음에 묻힌 기억

 
그린란드 역사의 서막을 연 바이킹의 정착은 후대 소유권 논쟁의 신화적 기원이 되었다. 이 시기는 그린란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외부 세계에 처음으로 그 존재를 각인시킨 중요한 출발점이었으나, 동시에 후대 정착민을 유인하기 위한 선구적인 프로파간다와 자원 고갈로 인한 망각의 역사를 품고 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린란드의 진정한 주인은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이누이트족이었다. 흔히 ‘에스키모’로 알려졌으나, 이는 원주민 언어로 ‘날것을 먹는 사람’이라는 경멸적 뉘앙스를 담고 있어 당사자들이 기피하는 용어다. 따라서 그들의 고유한 명칭인 **‘이누이트(Inuit)’**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유럽인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인물은 ‘붉은 머리 에릭(Erik the Red)’이라는 바이킹이었다. 그의 여정은 폭력과 추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서기 982년, 노르웨이에서 살인을 저지른 그는 아이슬란드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또다시 살인을 저질러 3년간의 추방령을 받게 되자, 그는 더 서쪽으로 항해하여 마침내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
 
3년 후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에릭은 정착민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교묘한 심리전이자 선전 활동을 펼쳤다. 자신이 발견한, 국토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에 **‘그린란드(Greenland, 녹색 땅)’**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붙였다. 반면, 온천과 화산 활동으로 상대적으로 살기 좋았던 아이슬란드는 이미 외부인의 유입을 막으려는 기존 정착민들에 의해 **‘아이슬란드(Iceland, 얼음의 땅)’**라 불리고 있었다. 실제 환경과 정반대인 이 기만적인 작명은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아이슬란드인들이 ‘녹색 땅’의 꿈을 안고 그린란드로 이주했다.
 
초기 바이킹 정착지의 경제는 바다코끼리 사냥에 의존했다. 당시 십자군 전쟁으로 아프리카산 상아 수입이 막히자, 유럽 귀족들은 바다코끼리 상아로 만든 체스 말을 최고의 사치품으로 여겼다.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상아 수출로 부를 쌓았지만, 그 번영은 짧았다. 무분별한 남획으로 바다코끼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소빙하기’가 닥치면서 기후는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바이킹 정착지는 폐허로 변했고, 그린란드는 수백 년간 유럽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잊힌 땅이 되었다. 이는 훗날 주권 문제가 다시 부상하는 배경이 되었다.
 
 
 
 

2. 잊혀진 땅과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주권의 재확인

 
유럽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정치적 지각 변동은 수백 년간 잊혔던 그린란드를 다시 역사의 무대로 소환했다. 특히 북해의 경제적, 군사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경쟁 속에서 탄생한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은 그린란드 소유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4세기 후반, 독일 북부 항구 도시들이 결성한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은 북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며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제적 생존을 위협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위협을 넘어 교역로를 차단할 수 있는 실존적 위기였다. 이에 덴마크는 같은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웨이에 연합을 제안했고, 1397년 덴마크가 주도하는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이 탄생했다. 이 시점에서 비록 사람은 살지 않았지만, 그린란드는 역사적으로 최초 발견자인 노르웨이 바이킹의 유산으로 간주되어 노르웨이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1721년, 노르웨이 출신의 개신교 목사 한스 에게데(Hans Egede)가 잊혀진 바이킹 후손들을 찾아 개종시키겠다는 사명감으로 그린란드를 방문했다. 그가 마주한 것은 폐허가 된 정착지와 원주민 이누이트족뿐이었다. 그는 목표를 수정하여 이누이트족에 대한 선교를 시작했고, 이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에게데 목사의 보고를 계기로,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은 1721년 그린란드를 공식적으로 **‘노르웨이 영토’**임을 선언하며 주권을 재확인했다. 이로써 그린란드는 연합 왕국의 틀 안에서 노르웨이의 영토로 공식 편입되었다. 그러나 연합 하에서 재확인된 그린란드의 운명은 곧 유럽 대륙 전체를 휩쓴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에 따라 극적으로 바뀌게 될 운명이었다.
 
 
 
 

3. 나폴레옹의 포성, 덴마크의 뜻밖의 소유권

 
유럽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나폴레옹 전쟁의 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백 년간 잊혔던 북극의 빙하 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은 그린란드의 주권이 노르웨이의 역사적 유산에서 덴마크의 행정적 자산으로 변모하는, 의도치 않은 지정학적 재편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해상 패권을 두고 영국과 오랜 경쟁 관계에 있던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은 자연스럽게 나폴레옹의 프랑스 편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쟁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고, 승전국들은 패전국인 덴마크에 책임을 물었다.
 
전쟁의 대가는 가혹했다. 1814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덴마크는 패전의 책임으로 연합 왕국의 파트너였던 노르웨이를 승전국인 스웨덴에 할양해야만 했다. 스웨덴은 영국 편에 서서 싸운 대가를 이처럼 보상받았다. 그러나 이 운명적인 조약에는 그린란드의 미래를 결정지은 결정적인 단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노르웨이 본토만 스웨덴에 양도하며, 그린란드를 포함한 노르웨이의 해외 영토는 덴마크가 계속 보유한다.”
 
이 조항 하나로, 역사적으로 노르웨이의 영토였던 그린란드의 주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정학적 역학 관계에 따라 공식적으로 덴마크로 이전되었다. 덴마크는 이렇듯 전쟁 패배의 대가로 지도에서나 존재하던 거대한 빙원을 떠안게 되었다. 한 세기 동안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이 영토는, 20세기 기술의 발전이 북극 항로를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최단 경로로 만들면서, 강대국들의 생존이 걸린 체스판의 핵심 요충지로 그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4. 냉전 시대와 미국의 전략적 부상: 지정학적 요충지로의 전환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던 냉전 구도는 그린란드를 단순한 덴마크의 자치령에서 양대 강국의 대치 전선 최전방으로 변모시켰다. 그린란드의 독특한 지리적 위치는 그 운명을 국제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냉전 시대에 그린란드가 군사적 요충지로 급부상한 이유는 명확했다. 북극을 가로지르는 경로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가장 빠른 최단 공격 루트였으며, 그린란드는 바로 그 경로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이 그린란드를 통제한다면 소련의 심장부인 모스크바를 코앞에 두는 것과 같은 압도적인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가치를 간파한 미국은 1946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덴마크 정부에 1억 달러를 제시하며 그린란드 구매를 공식 시도했다. 덴마크는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판매 대신 미군이 그린란드에 공군 기지를 비롯한 각종 군사 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합의는 그린란드의 주권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본격화되는 신호탄이었으며, 곧이어 그린란드 땅에서 벌어질 비극적인 비밀 군사 작전들의 서막이기도 했다.
 
 
 
 

5. 미군 주둔의 어두운 유산: 핵 폐기물과 감춰진 진실

 
냉전 시대 미국의 군사 활동은 그린란드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현재진행형인 환경적 위협을 남겼다. 공식적인 합의 이면에서, 미국은 그린란드의 주권을 무시한 채 극비 군사 프로젝트들을 강행하며 이 거대한 섬을 거대한 위험에 빠뜨렸다.
 

5.1 프로젝트 아이스웜 (Project Iceworm, 1959)

 
1959년, 미국은 덴마크 정부에도 알리지 않은 채 빙하 아래에 비밀 핵미사일 기지 **‘캠프 센추리(Camp Century)’**를 건설했다. ‘아이스웜(Iceworm, 얼음 지렁이)’이라는 작전명처럼,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빙하 밑에 총 길이 4,000km에 달하는 지하 터널을 뚫고, 그 안에 핵탄두 600개를 실은 열차를 계속해서 운행시키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핵 열차를 통해 소련의 탐지를 교란하고 보복 공격 능력을 확보하려 했던 무서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살아 움직이는 빙하의 유동성을 간과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빙하의 압력으로 터널은 계속 뒤틀렸고, 결국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다. 미군은 핵탄두는 회수했지만, 기지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의 핵폐기물과 방사능 오염 물질은 거대한 빙하가 영원히 덮어줄 것이라 믿고 그대로 유기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2080년경에는 이 끔찍한 유산이 완전히 노출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5.2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사건 (1968)

 
‘브로큰 애로우’는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핵무기를 지칭하는 미군의 암호명이다. 1968년, 그린란드 상공에서 이 끔찍한 코드명이 현실이 되었다. 수소폭탄 4발을 싣고 비행하던 미군 B-52 폭격기가 승무원의 부주의로 발생한 기내 화재로 그린란드 얼음판 위로 추락했다.
 
최악의 핵폭발은 피했지만, 추락 충격으로 폭탄이 파손되면서 다량의 방사능 물질이 얼음 위로 광범위하게 유출되었다. 미군은 급히 수습에 나섰으나 파손된 폭탄 3발의 잔해만 회수했을 뿐, 나머지 1발은 끝내 찾지 못하고 얼음 속 어딘가에 유실된 상태로 남아있다. 오늘날 미국이 그린란드에 집착하는 이유 중 하나가 희토류 같은 자원 문제뿐만 아니라, 과거에 저지른 이러한 과오와 그 치부를 은폐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6. 덴마크의 식민 통치와 인권 문제: 원주민 말살 정책

 
그린란드의 주권자인 덴마크 역시 원주민 이누이트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식민 통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만연했던, ‘계몽’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식민주의적 온정주의의 가장 잔혹한 지역적 발현이었다. 덴마크는 이누이트족을 ‘열등한 2등 시민’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덴마크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조직적인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6.1 강제 동화 정책 (1951년 이후)

 
1951년부터 덴마크 정부는 소위 ‘어린이 개조 작업’이라는 이름으로, 똑똑하다고 판단된 이누이트 어린이들을 선발해 부모의 동의 없이 강제로 덴마크 본토로 보냈다. 아이들은 모국어 사용을 금지당하고 오직 덴마크어와 덴마크 문화만을 배우도록 강요받았다. 수년 후 고향에 돌아온 이들은 언어 장벽으로 부모와 소통할 수 없었고, 덴마크화된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극심한 정체성 혼란에 시달린 희생자 대부분은 자살이나 약물 중독으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6.2 강제 불임 시술

 
덴마크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누이트족의 인구를 줄여 씨를 말리려는 의도로,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가임기 이누이트 여성 약 4,500명에게 강제로 불임 시술을 자행했다. 특히 12세에서 14세에 불과한 어린 소녀들까지 학교 양호실과 같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강제로 피임 기구(루프) 시술을 받게 한 비인도적 만행은 명백한 인종 청소 시도였다. 현재까지 생존 피해자들은 덴마크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며, 이로 인해 덴마크는 그린란드에 대한 지배의 도덕적 정당성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7. 결론: 그린란드의 미래와 자결권

 
그린란드의 주권 역사는 바이킹의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해 유럽 열강의 정치적 거래의 흥정물이 되었고, 냉전 시대에는 강대국의 전략적 도구로 이용당하는 굴곡의 시간이었다. 미국 군사적 편의주의의 어두운 유산과 덴마크 식민주의적 온정주의의 잔혹한 상처는 오늘날 그린란드가 자결권을 향한 길을 나아가는 복잡한 도가니를 형성했다.
 
미국은 자국 안보를 명분으로 그린란드에 치명적인 핵 폐기물을 남겼고, 주권자인 덴마크는 보호가 아닌 비인도적인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한 가지 명백한 결론을 가리킨다. 그린란드의 미래 운명은 더 이상 미국이나 덴마크 같은 외부 세력의 전략적 계산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그 미래는 이 모든 역사적 부담을 딛고, 오직 그 땅의 주인이자 원주민인 이누이트족을 포함한 모든 그린란드인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고유하고 신성한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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