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전설이 된 대결, 그 후의 이야기
2016년 3월, 전 세계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역사적인 대결을 숨죽여 지켜봤다. 인류 대표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벌인 세기의 바둑 대결. 우리는 인간의 창의성이 기계의 계산을 뛰어넘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 희망은 4대 1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 앞에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우리는 AI가 인간의 훌륭한 스승이 되어 바둑계를 한 단계 발전시킬 것이라 막연히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알파고 쇼크 이후 바둑계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때로는 씁쓸하고 충격적인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이것은 전설이 된 대결, 그 이후의 진짜 이야기다.


1. 이세돌의 '신의 한 수'는 사실 알파고의 버그를 노린 '승부수'였다
알파고를 상대로 인류에게 유일한 1승을 안겨준 제4국의 78수. 이 수는 오랫동안 인간의 창의성을 상징하는 '신의 한 수'로 불리며 회자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몰랐던 진실이 숨어있다. 진짜 승부수는 78수가 아니었다.
이세돌 9단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진짜 승부수는 그보다 앞선 68수였다. 68수는 바둑의 정석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면 거의 두지 않을 변칙적인 수였다. 인간의 기보를 학습한 알파고는 확률이 낮은 수를 계산에서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세돌 9단은 바로 그 허점을 노렸다. 알파고의 계산에 혼란을 일으켜 오류를 유도하려는, 처절하고도 명민한 승부수였던 것이다.
78수를 많이 기억을 해 주시는데요 사실 78수는 그냥 두어가는 수순에 불과 같고요 그전에 68수가 사실은 승부수였습니다 68수는 정수가 아니에요 최선의 수가 아닙니다 오직 이제 알파고의 버그를 일으키겠다라는 일념에서도 쓴데요
'신의 한 수'라는 낭만적인 이름 뒤에는, 기계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든 인간의 절박하고도 기발한 해킹이 있었다. 이세돌 9단 스스로 이 승리를 이렇게 회고한다. "사국 같은 경우에는 정상적으로 이긴 게 아닙니다." 인류의 마지막 승리는 순수한 창의성의 승리가 아닌, 기계를 이기기 위해 인간다움을 버려야 했던 역설의 순간으로 기록된다.


2. 인간은 더 이상 AI를 이길 수 없다,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이세돌 9단과의 대국 이후, AI 바둑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했다. 초기 '알파고 마스터'는 인간의 기보를 학습했기에 그 수가 "우아해요"라는 평을 들으며 인간이 감탄하고 배울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변곡점은 인간의 기보 없이, 오직 바둑의 규칙만으로 독학하여 완벽의 경지에 오른 '알파고 제로'의 등장이었다.
알파고 제로가 두는 수는 인간 최고수들조차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완전히 이질적인 차원에 이르렀다. 인간 기보의 틀에서 벗어난 AI의 수는 너무나도 생경하고 기묘해서, 프로 기사들은 경탄을 넘어선 절망을 느껴야 했다. 이로써 바둑계의 목표는 'AI를 이기는 것'에서 'AI의 수를 이해하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인간은 알파고 제로의 그 바둑을 보면서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이해를 못 해요 왜 여기 놓지 저수가 분명히 정수에 가까울 텐데 왜 적을 놓는지 잘 일을 못 합니다 딱 보고 나서 그 모른다 그 개념이 아니라요 쭉 가도 몰라요 계속 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은 무의미해졌다. 이제 인간에게 남은 과제는 AI라는 압도적인 존재의 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배우는 것뿐이다.



3. AI는 바둑 기사들의 '개성(기풍)'을 지워버렸다
과거 바둑계에는 기사마다 고유의 스타일, 즉 '기풍(棋風)'이 존재했다. 두터운 세력을 중시하는 기사, 실리를 악착같이 챙기는 기사, 치열한 전투를 즐기는 기사 등 각자의 개성이 바둑판 위에서 화려하게 펼쳐졌고, 팬들은 그들의 독특한 서명에 열광했다.
하지만 AI의 등장은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AI가 모든 상황에 대한 '정답'에 가까운 수를 제시하자, 승리를 위해 모든 기사들이 AI의 추천 수를 따라 두기 시작했다. AI라는 절대적인 심판 앞에서, 한때 바둑판을 수놓았던 거장들의 독창적인 서명, 즉 기풍은 그 의미를 잃고 회색빛 균일함 속으로 녹아내렸다. 바둑의 황제 조훈현 국수는 이 변화가 주는 상실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AI가 나온다는 건 기쁨이란게 없어요 너나나 다 똑같아 ai가 추천하니까 그렇게 둘 수밖에 없고 그 뭐 뭐 구금이나 명 국수나 똑같아 매수는 그건 나쁘다는데 야 이거 안 두지 마라 그러는데 누가 두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기쁨이 다 너나 나는 나 똑같아서
AI라는 절대적인 정답지 앞에서, 인간 기사들의 다채로운 개성은 빛을 잃고 획일화되었다.


4. 현존 최강의 인간 기사는 '가장 AI를 닮은' 기사다
모두의 바둑이 AI를 닮아가는 획일화된 세계에서, 최강자란 어떤 의미일까? 아이러니하게도, AI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그 논리를 체화한 기사다. 현재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 9단의 별명은 '신공지능'이다. 그의 이름과 인공지능을 합친 이 별명은 그의 강함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의 힘은 단순히 AI의 수를 모방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AI의 사고방식을 내재화하여, AI처럼 유리한 상황을 유지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능력을 갖췄다. 신진서 9단 스스로 "AI를 따라 하는 게 아니라 AI처럼 계속해서 유리한 상황을 유지하면서 압박해 가려고 하는 편"이라고 말한다. 그의 강함은 모방이 아닌 체화에 있다.
한 연구 결과는 이를 냉정한 수치로 증명한다. 신진서 9단의 AI 일치율은 37.6%에 달하며, 이는 95.7%라는 경이로운 승률로 이어졌다. 반면, 연구 대상 중 가장 낮은 일치율을 보인 기사는 22.6%의 일치율과 27.3%의 승률에 그쳤다. AI의 논리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절대적인 척도가 된 것이다.


5. AI는 실력 평준화가 아닌 '격차 심화'를 가져왔다
모두가 AI라는 최고의 스승을 가졌으니, 프로 기사들의 실력은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AI는 실력의 평준화가 아닌 '격차 심화'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AI가 제시하는 수는 그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최상위권 기사들에게만 온전한 무기가 되었다. 반면,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대다수 기사들에게 AI는 너무 어려운 '답안지'와 같아서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결국 AI를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에 따라 최상위권과 그 외 기사들 사이의 격차는 과거보다 훨씬 더 벌어지고 말았다.
오히려 인공지능 시대에서 상향 평준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격차가 오히려 벌어지더라
최고의 도구가 모두에게 주어졌을 때, 그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의 차이가 오히려 더 큰 격차를 만든다는 이 역설은 바둑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결론: 바둑판이 던지는 질문
알파고 이후 10년, 바둑의 세계는 '신의 한 수'의 낭만이 사라지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AI가 등장했으며, 기사들의 개성이 지워지고, AI와의 일치율이 강함의 척도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평등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승자와 패자의 격차는 더욱 잔인하게 벌어졌다.
바둑판 위에서 벌어진 이 심오하고도 거대한 변화. 이것이 비단 바둑계만의 이야기일까? AI가 우리 사회의 다른 전문 분야에 스며들 때, 우리 또한 최고의 도구를 손에 쥐고도 더 깊은 불평등을 마주하게 되지는 않을까? 바둑판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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