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세계는 다시 한 번 깊은 애도에 잠겼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1936~2025), 세상을 향해 '자비'와 '정의'를 외쳤던 지도자가 88세를 일기로 선종했습니다.
그는 전통적 교황상의 틀을 깨고,
- 미주 대륙 최초의 교황,
- 예수회 출신 최초의 교황,
-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처음 선택한 교황으로서,
가톨릭 교회와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포용과 연대의 신앙",
"지구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신앙" —
프란치스코 교황이 던진 이 메시지들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직접 발로 뛰고, 손을 내밀며, 때로는 깊은 상처를 감수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향해 길을 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동시에 받는 비판,
- 성추문 스캔들에 대한 미완의 대응,
- 개혁을 향한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
이 모든 것은 그를 둘러싼 세계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시대적 짐을 말해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속적 권력을 좇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끝"**에서 와서,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걸어갔던,
진정으로 **"사람들의 교황"**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과 발자취를 찬찬히 돌아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되새겨보려 합니다.
🌍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남긴 교황
교황 프란치스코(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는 가톨릭 교회를 전통적 도덕 교리에서 벗어나 사회적·경제적 정의에 초점을 맞추려 했던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재임 기간 동안 교회 내 갈등이 심화되었고, 성직자 성추문 스캔들의 그림자도 끝내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88세의 나이로 선종했으며, 올해 초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이후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메시지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전통적 도덕 규범(예: 낙태 반대, 동성애 금지)보다,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정의, 환경 문제에 훨씬 더 깊이 집중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는 서구보다,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는 지역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그는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냈습니다.
- "돈은 새로운 우상이다."
- "경제가 사람을 배제하고 가난을 낳을 때, 그런 경제는 죽음의 경제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대규모 이민자 추방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이민자는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강조한 것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멕시코 국경 지역을 방문해 국경을 넘다 희생된 이주자들을 위해 직접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는 역사적인 회칙 『라우다토 시(Laudato Si')』를 발표해, 기후변화 대응은 정치가 아니라 도덕적 문제라고 천명했습니다.
이 회칙은 전 세계 정치인, 과학자, 시민단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교황이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세계적 윤리 지도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신앙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세계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외쳤던 사회정의와 포용의 메시지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살아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처음’으로 가득 찼던 그의 길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첫 번째' 기록을 세운 교황이었습니다.
- 미주 대륙 출신 첫 교황
- 예수회 출신 첫 교황
-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 교황
- 전임 교황(베네딕토 16세)의 사임 후 선출된 첫 교황
그는 격식을 줄이고 친근한 이미지를 강조했으며, 소형차를 타고, 기자회견에서도 솔직한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존재 자체가 "새로운 시대"를 상징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첫 번째’ 기록을 남겼습니다.
- 미주 대륙 출신 최초의 교황: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으로, 유럽 중심이던 교황직의 지리적 중심을 남반구로 확장시켰습니다.
- 예수회(Jesuit) 출신 첫 교황: 지성, 교육, 사회정의를 중시하는 예수회 정신을 교황청에 깊이 반영했습니다.
-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처음 선택한 교황: 가난과 평화를 상징하는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겠다는 의지를 이름에 담았습니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이후 선출된 최초의 교황: 거의 600년 만에 전임자가 생존한 상태에서 교황직을 이어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취임 직후부터 상징적인 작은 변화들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 교황 전용 리무진 대신 포드 포커스를 타고 다니며,
- 화려한 교황 궁 대신 게스트하우스의 소박한 방에 머물렀습니다.
- 공식 석상에서는 전통적인 교황 예복이 아닌, **단순한 백색 수단(사제복)**만을 착용했습니다.
처음 공식 석상에 등장했을 때,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Buona sera(좋은 저녁입니다)."
교황들의 전통적 축복문구 대신, 평범하고 따뜻한 인사로 인류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러한 '처음'들의 연속은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 전체에
"우리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습니다.
🤝 사회적 약자와 함께한 여정
프란치스코는 난민, 이민자, 가난한 이들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대규모 추방 계획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환경 보호를 위해 각국 정부에 탄소 배출 감소를 촉구하는 등 세계적인 이슈에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내내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무게 중심을 기존의 강대국 중심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이주민, 난민, 경제적 약자로 이동시키려 했습니다.
특히 그는 서구 국가들이 국경을 봉쇄하고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비판했습니다.
- 멕시코 국경을 찾아, 국경을 넘다 목숨을 잃은 이주자들을 위해 직접 기도했고,
- 유럽 난민 캠프를 방문해 어린 난민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2019년, 지중해를 건너다 목숨을 잃은 난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바티칸에 특별한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이민자는 위험이 아니라 희망이다."
또한 교황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지역을 여러 차례 방문해,
- 전염병과 기아에 시달리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 자연 재해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국제사회에 도움을 촉구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교회의 사명이 단순히 교리적 가르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가장 약한 이들과 함께 걷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가 아니다."
이런 믿음 아래,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행동하는 사랑(Agape)**을 실천할 것을 거듭 요청했습니다.
🏳️🌈 전통과 개혁 사이의 외줄 타기
프란치스코는 동성애자 사제에 대해 "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전통적 가톨릭 교리에 대한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직자 독신 규정을 완화하는 데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 진보적 주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기간 동안 끊임없이 '전통'과 '개혁'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습니다.
그는 고정된 교리 해석보다는 개인의 양심, 자비, 관용을 강조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순간 중 하나는 바로 **"Who am I to judge?"(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는 발언입니다.
이 짧은 문장은,
- 성적 지향을 이유로 사람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 가톨릭 교회 내부의 문화적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는
- 이혼 후 재혼한 신자들의 영성체(성체성사) 참여를 용인하고,
- 피임 문제에 대해 "양심에 따라 결정하라"고 조언했으며,
- 동성 커플에 대해 "시민 결합은 인정될 수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이런 입장은 전통적 교리를 중시하는 보수 가톨릭 진영에서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일부 보수 추기경들은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 "교황이 교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공개 서한도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보 진영은 "변화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 **"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특히 여성의 사제 서품, 성소수자 축복 문제 등에서는 프란치스코도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며 균형을 맞추려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일관되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차가운 법규의 박물관이 아니라, 열린 병원이어야 한다."
그의 접근은 교회 내부에 분명한 긴장을 남겼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이 오늘날 인간의 삶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 성추문 대응, 빛과 그림자
프란치스코는 아동 성추행 문제에 대해 '제로 톨러런스'를 외쳤지만, 실질적 조치가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전 워싱턴 대주교인 시어도어 매캐릭 추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비판이 교황청을 흔들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직 초기에 성직자 아동 성추행 스캔들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성추행 문제에 대해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응에서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했습니다.
🔵 긍정적인 변화
- 2019년, 전 세계 주교들을 바티칸으로 소집해 **"성추행 근절을 위한 정상회의"**를 개최했습니다.
- 성추문 사건 관련 문서에 대한 비밀주의를 완화하고, 경찰 및 검찰과의 협력 길을 열었습니다.
- 주교나 고위 성직자가 성추행을 은폐하거나 방조한 경우, 징계할 수 있는 규정을 새로 도입했습니다.
🔴 비판과 한계
- 초반에는 성추문 문제를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대응 속도도 매우 느렸습니다.
- 피해자 보호 기구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제시한 핵심 권고사항(예: 주교 재판소 설치)을 실질적으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 일부 성추행 가해자에 대해 기존 판결을 경감하거나 감형해주는 사례도 나오면서, 피해자 단체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 칠레 성추문 스캔들에서는 가해 주교를 "중상모략의 피해자"라고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고 결국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미국 워싱턴 대교구의 전 대주교 시어도어 매캐릭 사건은 프란치스코 개인에게도 큰 타격을 줬습니다.
- 프란치스코가 매캐릭의 성적 비행에 대한 보고를 무시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 교황은 이 사안에 대해 뒤늦게 해명하고, 매캐릭을 추방했지만 신뢰에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성추문 대응은
**"개혁하려 했지만, 근본적 문화적 전환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이 복잡한 유산은 앞으로도 가톨릭 교회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 전략적 인사와 교황 선출의 미래
프란치스코는 주요 보수 성향 주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통가·라오스 등 비주류 지역 출신 인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결과, 차기 교황 선출을 좌우할 수 있는 추기경단의 3분의 2를 자신이 지명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유산을 이어갈지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직 기간 동안 추기경단(Cardinal College)의 구성을 전략적으로 재편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권 행사가 아니라, 차기 교황 선출 과정을 장기적으로 염두에 둔 치밀한 포석이었습니다.
🔵 프란치스코의 인사 스타일
- 서구의 대도시 대교구(예: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주교들을 의도적으로 승진시키지 않고,
- 통가, 라오스, 미얀마, 남수단 등 상대적으로 주류 교회 체계 바깥의 지역에서 추기경을 발탁했습니다.
- 이를 통해 추기경단의 지리적, 문화적 다양성을 획기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 전체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의 약 2/3를 직접 임명했습니다.
- 교황 선출에 필요한 2/3 찬성선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어느 정도 마련한 셈입니다.
🔴 교회 내부의 긴장
- 보수 진영은 프란치스코가 전통적 신학 중심의 교회 모델을 해체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 반면 진보 진영은 그가 개혁을 향해 충분히 전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 이러한 긴장과 분열은 교황 사후에도 교회 내부에 계속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다가오는 콘클라베(교황 선거회의)
- 프란치스코가 심어놓은 새로운 추기경 그룹은 분명 그의 유산을 계승할 후보를 뽑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그러나 교회 내부의 보수파, 진보파 간 갈등과 전 세계 지역 교회 간 이해관계도 여전히 복잡하게 얽혀 있어,
- "프란치스코 2.0"을 뽑을지, 아니면 보수적 반동을 택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결국, 프란치스코가 만든 변화의 씨앗은
다음 교황이 어떤 방향으로 키워가느냐에 따라 그의 진정한 유산이 완성될지 여부가 결정될 것입니다.
🧪 청춘의 방황과 신앙으로의 전환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화학을 전공했으며, 바 도어맨으로 일하면서 탱고 춤도 능숙하게 췄다고 합니다.
17세 무렵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했지만, 어머니는 의사가 되길 바랐다고 합니다. 그는 "영혼의 의사"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가난했지만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청소년기에 화학 기술 고등학교(vocational school)에서 공부하며 화학 분야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졸업 후에는 잠시 화학 실험실 연구원으로 일하거나, 바(bar) 도어맨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고민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와 뒷골목에서 탱고 춤을 즐기며 젊음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탱고는 내 피 속에 흐르고 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청춘기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6세였던 그는 문득 교회에 들어가 고해성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 느낀 강렬한 체험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께 부름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지만,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어라"**며 아들의 결정을 만류했습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겠습니다."
20세 때 심각한 폐렴으로 오른쪽 폐의 일부를 절제해야 했던 경험은,
그가 인생을 보다 겸허하게 바라보게 만든 또 다른 전환점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해,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 군부 독재와 '조용한 외교'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일부에서는 그가 정권에 협력했다고 비판했으나,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등은 그를 옹호하며 조용한 외교로 피해자들을 보호하려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969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73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아르헨티나 예수회 지방장(Provincial Superior)으로 임명됩니다.
이 시기는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
**"더러운 전쟁(La Guerra Sucia)"**이 펼쳐지던 시기였습니다.
1976년 군부 쿠데타로 시작된 독재 정권은
- 수만 명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체포하고,
- 고문과 실종, 살해를 자행했습니다.
이 끔찍한 상황 속에서, 프란치스코는 매우 조심스러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정권과 충돌을 피했지만,
- 고위 군인들을 설득해 구금된 이들의 석방을 유도하거나,
- 위기에 처한 동료 사제와 신자들을 숨겨주고 피신시켰다는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군부를 공개 비판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점은,
훗날 **"군부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두 명의 예수회 신부가 납치되어 고문당한 사건은 오랫동안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에 대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은
**"베르골리오는 군부에 저항하면서도, 조용한 외교로 사람들을 살리려 했다"**고 옹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자신도 훗날 이 시기를 회고하며,
- "나는 그때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 "충분히 용감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결국, 군부 독재 시기의 모순된 경험은
프란치스코에게 **"권력에 맞서되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고,
그 이후 그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리더십 스타일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 검소한 삶, 빈민가를 누비다
추기경이 된 이후에도 그는 대저택 대신 작은 아파트에 살며, 직접 요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를 돌며 서민들과 함께 호흡했던 모습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베르골리오 추기경(훗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를 이끌면서,
세상의 화려함과 권위와는 거리를 두는 검소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대주교 관저가 아닌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직접 요리를 해 먹으며 가사일을 도왔습니다.
공식 차량 대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이동했으며,
경호 인력 없이 가난한 지역을 홀로 방문하곤 했습니다.
특히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대한 빈민가,
**"빌라 미세리야(Villa Miseria)"**를 자주 찾았습니다.
- 진흙탕을 맨발로 걸어다니며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고,
- 어머니들의 고충을 들었으며,
- 마약과 폭력에 시달리는 젊은이들과 대화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구호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걷는 것"**을 진정한 사목이라 믿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면 먼저 먼지를 묻혀야 한다."
그의 이 신념은 교황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었습니다.
이러한 검소한 삶은 단순한 개인적 미덕이 아니라,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신학적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 교회 개혁과 ‘가난한 교회’
프란치스코는 취임 직후부터 바티칸 은행 개혁, 재정 투명성 강화에 나섰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라우다토 시'를 통해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교황에 선출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황 이름을 '프란치스코'라고 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성 프란치스코처럼, 교회를 새롭게 하고 싶었다."
- "가난, 평화, 창조물의 보호를 위해 헌신하고 싶었다."
취임 직후, 그는 바티칸 내 오랜 문제였던
- 부패,
- 불투명한 재정,
- 권력 중심주의
를 개혁하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 구체적인 개혁 조치들
- 바티칸 은행 개혁: 돈세탁 방지 조치와 외부 감사 도입.
- 재정 투명성 강화: 바티칸 자산을 외부 전문가 위원회에서 관리.
- 교황청 관료주의 축소: 지나치게 비대해진 교황청 부서를 정비하고 권한을 분산.
- 세계 빈곤 문제에 집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세계의 날' 제정.
그는 "교회는 궁전이 아니라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픔 속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며, 고통받는 이들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신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교황청 내부의 강력한 저항에도 직면했습니다.
- 일부 보수적 고위 성직자들은 "프란치스코가 전통적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 개혁을 진행하던 바티칸 재정 고위 인사들 간의 갈등과 스캔들도 터져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규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신과 문화를 근본부터 바꾸려는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개혁적 비전은,
"교회는 가장 약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곁에 서야 한다."
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남아 있습니다.
🤲 이슬람과의 대화, 중국과의 협상
그는 이슬람권 국가를 자주 방문하며 발을 씻기는 의식을 통해 종교 간 화해를 추구했습니다.
또 중국과 주교 임명권을 두고 합의를 이루었지만, underground 교회를 지지했던 중국 내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는 실망감도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 간 대화를 자신의 주요 사목 목표 중 하나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 개선에 특별히 힘을 기울였으며,
**"종교는 평화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 이슬람 세계와의 적극적 교류
- 2014년,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을 순방하며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의 화해를 촉구했습니다.
- 2019년, 아부다비를 방문해 역사상 최초로 아라비아반도에 발을 디딘 교황이 되었습니다.
- 아흐메드 알-타예브 대이맘(이집트 알아즈하르 대학교 총장이자 수니파 최고 권위자)과 공동으로
**'세계 평화와 공존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특히 그는 성목요일 발 씻김 예식을 통해,
- 무슬림,
- 여성,
- 죄수 등 사회적 소외 계층을 포함해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일관되게
"이슬람은 폭력의 종교가 아니다",
**"폭력은 종교를 가장한 왜곡된 인간의 행위"**라고 강조했습니다.
🔴 중국과의 미묘한 협상
프란치스코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도전했습니다.
2018년, 바티칸은 중국 정부와 주교 임명권에 관한 잠정 합의를 체결했습니다.
- 중국 정부가 추천한 후보 중 교황이 최종 승인하는 형태였습니다.
- 이는 수십 년간 단절되어 있던 바티칸-중국 관계를 복원하는 역사적 합의였습니다.
하지만 이 협정은 교황청 내부와 중국 가톨릭 공동체 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중국 지하교회(정부 승인을 거부하는 공동체)는
**"정부 통제에 굴복했다"**며 배신감을 표현했습니다. - 인권 단체들은
**"중국 정부의 종교 탄압을 눈감아주는 결과"**라며 비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중국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는 대신,
**"대화를 통한 천천한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그의 방식은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장기적으로 세계 가톨릭 교회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미지의 땅과 연결될 수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 "자비"를 화두로 한 교황직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교황직을 관통하는 주제를 '자비'로 정했습니다.
이혼 재혼자에 대한 성체 허용, 피임에 대한 양심적 판단 존중, 동성 커플에 대한 민법적 인정 등 포용적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 좌우로부터 동시에 비판받은 개혁
보수층은 그가 교리를 흐린다고 비판했으며, 진보층은 그가 개혁의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특히 독일 주교회의의 급진적 제안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전 세계적 교회 개혁을 위한 글로벌 시노드를 소집해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교황직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비(Mercy)"**를 내세웠습니다.
그는 인간의 약함을 판단하거나 배제하는 대신,
**"조건 없는 용서와 치유"**를 가르쳤습니다.
🔵 자비의 실천적 표현들
- 2015년, '자비의 특별 희년(Year of Mercy)'을 선포해 전 세계 교회에 **열린 문(holy doors)**을 설치하고,
누구든지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도록 장려했습니다. - 이혼·재혼자에 대한 영성체 규정을 완화하고,
- 병들거나 소외된 이들에 대해 더 큰 포용을 강조했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환영하는 곳이어야지, 완벽한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클럽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는 이 말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특히, 동성애자들을 향해
**"그들도 하느님이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강조했으며,
동성 커플의 시민적 권리를 지지하는 발언도 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한,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기도했던 모습,
- **"우리는 모두 같은 폭풍 속에 있지만, 서로 다른 배를 타고 있다"**는 메시지
는 인류 전체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 보수 진영과의 긴장
하지만 이런 포용적 태도는 전통적 교리를 중시하는 가톨릭 보수층에게는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 일부 추기경과 주교들은 그가 교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고 비판했습니다.
- 특히 이혼·재혼 문제나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흔들림 없이 강조했습니다.
"자비는 복잡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의 행동이다."
그에게 자비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였던 것입니다.
🌎 "지구 끝"에서 온 교황의 마지막 유산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도 남반구(Global South) 가톨릭 교회를 위한 메시지를 남기려 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끝에서 왔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유산은 경제적 약자와 주변부를 위한 교회의 사명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남겼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을
**"세상의 끝에서 온 교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의 출신지인 아르헨티나는 지리적으로도 유럽 중심의 가톨릭 세계에서 가장 먼 곳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교회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중심이 아닌 주변부로 눈을 돌리자"**는 근본적 전환이었습니다.
🔵 프란치스코의 유산
- 사회적 약자, 가난한 이들, 이주민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 기후위기 대응을 신앙적 과제로 제시했습니다. (『라우다토 시』)
- 교회 조직을 탈중앙화하고, 다양한 지역 교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전통적 유럽 중심주의를 넘어,
- 아프리카,
- 아시아,
- 남미
신자들의 생생한 현실을 교회의 중심에 가져오려 했습니다.
🔴 앞으로의 과제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시도한 이 거대한 방향 전환이
- 다음 교황 선출 이후에도 이어질지는 불확실합니다.
- 교회 내부의 보수-진보 균열은 여전히 심각하고,
- 전 세계 가톨릭 공동체 역시 다원적 요구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분명히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라는 꿈을 남겼습니다.
그가 심은 씨앗은, 시간이 흐르며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릴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 마무리: 프란치스코, 세상을 향해 건넨 마지막 인사
교황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향해 "자비", "포용", "정의"를 외쳤던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길고 복잡한 발자취는 앞으로 가톨릭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음 교황은 이 유산을 계승할까요,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할까요? 그의 마지막 인사는 우리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남겼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포용과 자비의 신앙",
**"지구와 함께 숨 쉬는 신앙"**이라는 유산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는 전통과 현대 사이, 신앙과 현실 사이의 좁은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면서도
늘 **"사람"**을 잊지 않았습니다.
교황궁 대신 소박한 게스트하우스를 택하고,
권력자보다 이민자와 난민을 먼저 찾던 그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신앙이란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를 묻는 살아있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개혁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 교회 내부의 갈등은 여전히 심각하고,
- 성추문 스캔들은 아직도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 세계 각지에서 변화와 저항은 계속 부딪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알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단숨에 오지 않는다."
"씨앗을 심는 사람은 결과를 당장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심은 씨앗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그 씨앗이, 때로는 고요히, 때로는 격렬히,
더 인간적인 교회, 더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Buona sera(좋은 저녁입니다)."
처음 교황으로 등장한 그날 밤의 인사처럼,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향해 따뜻한 인사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이제, 그가 남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
'배움: MBA, English, 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트럼프 vs 미국 제도권: 저항의 불꽃이 살아나다 (23) | 2025.04.22 |
---|---|
🌊 미래 해전의 게임체인저, 무인수상정(USV) 경쟁 본격화 (22) | 2025.04.22 |
🌍 새로운 세계 질서와 AI 시대: 격변의 2025년을 맞이하며 (33) | 2025.04.21 |
🚪 기회를 노린 순간: '나바로 부재'를 틈탄 움직임 (20) | 2025.04.21 |
🇺🇸🇨🇳 미중 무역 전쟁, 앞으로 어떻게 될까? (48) | 2025.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