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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책, 생각, 에세이

영포티, 젊음의 그림자와 성숙의 길목에서

by Heedong-Kim 2025. 11. 6.

영포티(Young Forty).

 한때는 세련된 자기관리의 상징처럼 들리던 단어다.
 하지만 요즘 그 말에는 묘한 비아냥이 섞여 있다.
 젊은 세대의 언어와 유행을 좇으며, 때로는 그것이 진짜 ‘젊음’이라고 착각하는 중년들.
 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다.

 

패션을 젊게 입고, 최신 유행의 말투를 쓰고, 젊은 감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짜 젊음은 옷의 색깔이나 외모의 윤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변화와 성찰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낯선 세대와의 거리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유연함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영포티는 결국 ‘성숙하지 못한 성장’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순간을 맞이한다.
 사회에서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히고, 가정에서도 아버지나 남편으로서의 책임이 익숙해진 시기.
 이쯤이면 ‘어른’이 되어 있을 것 같지만, 문득 거울을 보면 마음속의 나는 여전히 20대에 멈춰 있는 듯하다.

 

자동차, 오디오, 카메라, 혹은 골프와 게임.
 40~50대 남성들이 빠져드는 세계는 어쩌면 ‘현실의 무게를 잠시 잊게 해주는 피난처’일지도 모른다.
 이 취미들 속에서 그들은 한때의 열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열정이 때로는 ‘도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삶의 성찰보다 욕망의 회귀가 앞설 때, 그 젊음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나는 대학 4학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1, 2학년 후배들에게 조언이라며 늘어놓던 이야기들.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조금 더 ‘성숙한 선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저 ‘조금 더 나이든 학생’일 뿐이었다.

 

지식이 늘어나고 세상 이야기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게 곧 ‘성숙’은 아니다.
 성장은 몸의 키가 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성숙은 스스로를 깎아내는 고통의 과정이다.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나를 이해하려는 시선이 필요하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내 안의 허영과 미숙함을 마주해야 한다. 그 과정을 회피할 때, 우리는 성장만 하고 성숙하지 못한다.

 

나무는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든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가지가 꺾이고, 한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잎을 태우며 그렇게 살아남는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나이테로 새겨진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나무라도, 그 안에는 수많은 흔들림과 고통의 기억이 쌓여 있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겉모습은 나이를 먹고 세련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어른은, 그 세련됨의 이면에 ‘흔들림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이다. 상처받은 경험이 깊은 통찰로 변하고, 실패의 눈물이 타인을 이해하는 따뜻함으로 바뀌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성숙한 어른이다.

 

젊게 보이는 것은 나쁘지 않다.
 건강한 몸, 유연한 사고,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젊게 보이려는’ 노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것은 ‘보여지는 나’를 향한 집착이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정하는 태도다.

 

영포티라는 말이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은 그들의 옷차림이나 외모 때문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불편한 자기 부정 때문이다. 나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금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젊음의 모양을 빌려 자존감을 유지하려 할 때 그것은 이미 ‘성숙의 실패’가 된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성숙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시간은 단지 ‘경험의 기회’를 줄 뿐 그것을 ‘내면의 깊이’로 바꾸는 건 각자의 몫이다.

 

성숙은 결코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패 앞에서 자신을 탓하기보다 배움을 찾는 사람, 상처 속에서도 남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나이테를 늘려가는 사람들이다.

 

나이를 먹는 일은 자연의 순리지만, 성숙해지는 일은 의지의 선택이다.
 그 선택을 외면하면 우리는 언제든 ‘영포티’가 될 수 있다. 겉은 어른이지만 속은 여전히 20대 초반의 불안과 허영에 머문 채.

 

진짜 젊음은 나이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겸손함이다.
 어릴 적에는 몰랐던 감정, 불안과 외로움, 후회와 책임 같은 것들을 껴안으면서도 다시 한 걸음 내딛는 힘이 바로 젊음이다.

 

젊음이란 ‘나를 새롭게 갱신하려는 의지’다.
 그 의지가 사라질 때, 비록 외모는 젊게 보여도 그 사람의 영혼은 이미 늙어버린다. 반대로,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새겨졌더라도 그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젊다.

 

나이와 관계없이,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젊음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 애씀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젊게 살기’가 아니라 ‘성숙하게 젊음으로 살아가기’가 되어야 한다.

 

영포티라는 말에 담긴 조롱을 넘어서기 위해선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겉모습보다 마음을, 젊음보다 깊이를 추구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나이는 숫자가 되고, 젊음은 태도가 된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하루하루 성숙의 원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세련된 옷차림보다, 유행하는 말투보다 훨씬 더 오래 남는 젊음의 증거다.

 

그 젊음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쌓여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포티가 넘어야 할 마지막 성장의 벽,
 그리고 진정한 성숙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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