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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보다 천국이 더 힘들다? 고전 <신곡> 완독을 위한 뜻밖의 가이드

by Heedong-Kim 2026. 2. 24.

당신의 책장 속 '장식품'이 된 <신곡>을 위한 변호

누구에게나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끝까지 읽은 사람은 손에 꼽는 책, 바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입니다. 솔직히 말해볼까요? 우리에게 이 책은 지혜의 보고라기보다 책장의 품격을 높여주는 근사한 '장식품'에 가깝습니다. 압도적인 두께와 촘촘한 각주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이 위대한 고전을 '소장용'으로 분류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곤 하죠.
서울대학교 유성호 교수 역시 이 책을 완독하기 위해 '고통과 인고의 일주일'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천국편이 끝나는 날, 비로소 제 얼굴에 천국(해방감)이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평범한 독자들이 지옥 입구에서 발길을 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험난한 고전이 왜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류의 필독서로 손꼽히는 걸까요? 오늘은 그 장식품 같은 책을 우리 삶의 나침반으로 바꾸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Takeaway 1] 완독률 0.1%의 벽: 왜 우리는 지옥에서 멈추는가?

<신곡>은 서곡 1곡을 시작으로 지옥, 연옥, 천국 각 33곡씩 총 100곡으로 구성된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하지만 유성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완독의 길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1,000명의 독자 중 999명은 지옥편에서 멈추고, 남은 한 명조차 연옥편을 넘기지 못해 실질적인 완독률은 0.1%에 불과하죠.
그 물리적인 장벽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표적인 민음사 판본은 총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3분의 1이 각주와 해설입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과 인물들을 모르면 한 문장을 넘기기도 힘든 '주석의 숲'인 셈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가장 고결해야 할 '천국편'이 가장 읽기 힘들고 지루하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의 자극적인 고통에는 즉각 반응하면서도, 정적인 고결함과 평온함에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유성호 교수는 완독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천국편이 끝나는 날, 비로소 제 얼굴에 천국(해방감)이 찾아왔습니다."
 

[Takeaway 2] 운명의 여인 베아트리체: 짝사랑이 만든 위대한 서사

이 거대한 서사시를 지탱하는 힘은 뜻밖에도 지독한 '짝사랑'입니다. 단테는 9살에 한 살 어린 베아트리체를 처음 보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고, 9년이 흐른 18살에 그녀를 다시 마주칩니다.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단테는 전형적인 '모태 솔로'의 슬픔을 간직한 인물입니다. 9년 만에 재회했을 때도 베아트리체는 그저 그를 '친절한 동네 오빠'로 대했을 뿐이었으니까요.
베아트리체는 20대 중반에 요절했고, 단테는 깊은 상실감에 빠집니다. SNS도 메신저도 없던 시대, 단테는 오직 문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죽음마저 초월한 소통을 시도합니다. 그녀를 사후 세계에서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승화시킨 것이죠. 한 인간의 사적인 슬픔이 인류의 위대한 보편적 서사로 변모하는 순간입니다.
 

[Takeaway 3] 문학으로 복수하다: 단테의 사적인 지옥 리스트

단테는 피렌체의 행정 장관까지 지낸 고위 정치인이었으나, 정쟁에 휘말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피렌체로 돌아오면 화형에 처하겠다"는 위협 속에 30년 가까이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했던 단테는 <신곡>을 자신의 '사적 복수'를 위한 무대로 삼았습니다.
그는 지하로 내려가는 9개 층의 지옥을 설계하고, 자신을 쫓아낸 정적 필리포나 부패한 교황들을 지옥의 특정 층에 배치해 영원한 고통을 받게 묘사했습니다. 특히 가장 깊은 9층에는 '배신자'들을 배치했는데, 이는 그가 느꼈던 인간적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비화도 있습니다. 단테의 정적이 그의 원고(초반 7곡)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내용이 너무나 뛰어난 명작이라 감탄하며 오히려 단테에게 끝까지 집필을 완수하라고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적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단테의 문학적 천재성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Takeaway 4] 13세기의 파격: 지옥에서도 빛나는 인간 존엄

단테의 진정한 위대함은 단순히 적들을 지옥에 보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교조적인 기독교 원칙주의를 넘어선 개혁적 지식인이었습니다. 비록 지옥에 떨어진 죄인일지라도,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품격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입니다. 단테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당시의 엄격한 교리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의 훌륭한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지옥 1층인 '림보(Limbo)'에 배치했습니다. 또한 불륜의 죄로 지옥에 온 프란체스카를 향해서도 깊은 연민의 시선을 보냅니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지옥 7층에서 자신의 실제 스승을 만나는 대목입니다. 당시 교리에 따라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불의 비가 내리는 고통 속에 던져진 스승이었지만, 단테는 그가 그곳에서도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며 자신과 교감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종교적 죄의 유무보다 인간이 생전에 행한 선행과 성취를 우선시했던 단테의 시선은 13세기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결론: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하는가?

박상진 교수의 가이드북 <단테 신곡 인문학>은 완독을 가로막는 방대한 주석의 숲을 지나, 우리에게 '만남, 용기, 연민'이라는 핵심 나침반을 쥐여줍니다. 단테가 안내하는 지옥과 천국의 여정은 결국 700년 전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지옥의 적나라한 욕망과 천국의 정적인 고결함 사이에서 단테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가? 이제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그 두꺼운 책을 다시 꺼내보십시오. 단테가 안내하는 사후 세계를 모두 통과한 후, 당신은 어떤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겠습니까? 그 여정의 끝에서 당신은 비로소 장식품이 아닌, 당신만의 진정한 인생 가이드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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