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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책, 생각, 에세이

높은 자리에 선 사람도 같은 인간이다

by Heedong-Kim 2026. 8. 9.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이다.”

 

연세대학교 김학철 교수의 이 말은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우리는 자신이 충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믿는다. 여러 정보를 비교하고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그것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는 경우가 많다.

 

믿고 싶은 것을 먼저 믿는다. 선택하고 싶은 것을 먼저 선택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그 선택이 옳았다고 설명한다. 지식이 많을수록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커진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판단을 더 정교하게 합리화할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높은 학력과 뛰어난 지성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보장하지 않는 이유다.

 

사람들은 종종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어떻게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 비합리적인 집단이나 극단적인 믿음에 빠질 수 있을까. 어떻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명백해 보이는 모순을 외면할 수 있을까. 통일교와 같은 종교 집단 안에도 적지 않은 고학력자와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런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학력과 믿음은 단순한 반대 관계에 있지 않다. 많이 배웠다고 해서 언제나 잘못된 믿음을 간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뛰어난 지적 능력이 이미 받아들인 믿음을 방어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논리는 진실을 찾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과 선택을 지키는 방패가 될 수 있다.

 

사람은 논리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소속감이 필요하다. 인정받고 싶어 한다. 자신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외로움과 불안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어떤 집단이 강한 소속감과 명확한 세계관을 제공하면, 지적 수준과 관계없이 사람의 마음은 그곳으로 기울 수 있다.

 

일단 어떤 믿음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면 그것을 의심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 믿음을 부정하는 일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관계, 선택과 헌신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사람은 모순을 발견해도 믿음을 버리기보다 모순을 설명할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정당성을 발견하는 존재라기보다 정당성을 마련하는 존재에 가깝다.

 

나 역시 어릴 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교실 앞줄에 앉아 늘 높은 점수를 받는 아이들은 나와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머리와 태도, 내가 알 수 없는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절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그런 나에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벽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성문 기본영어와 맨투맨 영어를 펼쳐 들었다. 늦게나마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단어와 문법을 익히고 문장을 하나씩 이해했다. 수학도 다시 공부했다. 처음에는 더디고 답답했지만, 조금씩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늘 멀리서 바라보던 전교 10등, 전교 1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들은 놀라울 만큼 평범했다.

 

물론 공부를 잘했다. 집중력이 좋았고 자신만의 학습 습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친구 관계로 고민했다. 시험을 걱정했고 부모님과 갈등했다. 인정받고 싶어 했으며 때로는 불안해했다. 어떤 일에서는 현명했지만 다른 일에서는 서툴렀다. 내가 혼자 상상했던 신비로운 능력이나 완성된 인격은 없었다.

 

나는 그때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 사람은 실제보다 커 보인다. 성적과 순위가 그 사람 전체를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결국 같은 인간임을 알게 된다. 같은 욕망을 품고,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

 

이 경험은 어른이 된 뒤에도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우리는 특정한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을 만나면 그의 능력을 삶 전체로 확대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유명한 과학자가 사회 문제에 관해 말하면 그의 주장도 과학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기업가가 교육이나 정치, 인간관계에 관해 말하면 그 분야에서도 특별한 통찰을 가지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높은 직위에 오른 사람이 내린 판단이라면 일반 사람보다 현명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의 성공은 그 분야에서 일정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는 뜻일 뿐이다. 그것이 다른 모든 영역에서의 지혜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탁월한 외과의사가 반드시 좋은 투자자는 아니다. 뛰어난 공학자가 훌륭한 부모라는 보장도 없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인간관계에서도 성숙한 사람일 가능성은 별개의 문제다. 박사학위는 특정 분야의 깊은 연구 역량을 증명하지만,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 자격증은 아니다.

 

전문성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특정 영역에서 깊이 들어갈수록 다른 영역에는 충분한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기 어렵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루는 누구에게나 스물네 시간뿐이다.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려면 오랜 몰입이 필요하다. 반복과 집중이 필요하다. 때로는 가족과의 시간, 건강, 인간관계, 일상의 책임까지 희생해야 한다. 탁월함의 앞면에는 화려한 성취가 있지만, 뒷면에는 다른 영역의 결핍이 놓여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앞면만 본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읽고 감탄한다. 유명한 기업가가 이룬 혁신을 바라본다. 뛰어난 정치가나 과학자의 업적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취에 몰두하는 동안 누가 가정을 지켰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누가 생활을 책임졌고, 누가 감정을 받아 주었으며, 누가 반복되는 부재와 무관심을 견뎠는지는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다.

 

존경받는 인물의 개인적인 삶에 가까이 다가가면 때때로 더 깊은 헌신을 한 주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의 위대한 성취 뒤에는 이름 없이 시간을 내어 준 배우자와 가족, 동료와 조력자가 존재한다. 그들의 인내가 없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업적도 완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성공이 운이나 배경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성취에는 분명 노력과 재능,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다만 성공을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으로만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성공했다면 그에게는 노력 외에도 여러 조건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어난 시대와 나라, 부모의 경제력과 교육 수준, 건강, 만난 사람과 우연한 기회가 영향을 미친다. 실패를 피할 수 있는 안전망도 중요하다. 같은 노력을 하더라도 출발점과 환경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2000년 미국의 안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와 같은 해 아프리카의 가난한 오지에서 태어난 아이를 생각해 보자. 두 아이가 지닌 인간적 가치에 차이는 없다. 잠재력에도 본질적인 우열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만날 교육과 의료, 정보와 기회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공에 도달할 가능성 역시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취를 오직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믿는 것은 또 하나의 합리화가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도움을 쉽게 잊는다. 운이 좋았던 순간을 실력으로 해석한다. 실패하지 않아도 되었던 환경을 용기로 착각한다. 반대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노력 부족으로 판단한다.

 

높이 올라간 사람일수록 이런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

 

성공은 사람에게 자신감을 준다. 문제는 그 자신감이 자신이 잘 모르는 영역까지 확장될 때 생긴다. 한 분야에서 여러 번 옳았던 경험은 “나는 대체로 옳다”라는 확신으로 변하기 쉽다. 주변 사람들도 성공한 사람의 말에 쉽게 반대하지 못한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정직한 피드백은 줄어든다. 결국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릴 가능성을 확인할 기회를 잃는다.

 

지성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더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진정한 지성은 많은 것을 아는 능력에만 있지 않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인정하는 태도에 있다.

 

“이 분야에서는 내가 잘 알지만, 저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 짧은 문장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신의 전문성과 인격을 구분하고, 성취와 인간적 성숙을 동일시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뛰어난 능력을 보고 그 사람 전체를 숭배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부족함을 보고 그 사람 전체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부분적으로 탁월하고 부분적으로 부족하다.

 

어떤 사람은 숫자에 밝지만 감정에 어둡다. 어떤 사람은 말은 서툴지만 타인의 아픔을 깊이 이해한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어도 가족과 이웃에게 신뢰받는 사람이 있다. 화려한 경력을 지녔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다. 삶은 하나의 점수로 줄 세울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높은 성취를 존중하되 그것을 신화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성공한 사람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되 그의 모든 생각을 정답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학력과 직함, 재산과 명성이 판단을 대신하게 두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성공과 믿음도 끊임없이 의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진실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내린 결론을 지키기 위해 이유를 만들고 있는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인가.

 

이 질문은 불편하다. 그러나 인간이 합리화의 함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다.

 

어릴 적 내가 선망했던 앞줄의 아이들은 특별한 종족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른이 되어 만난 높은 지위의 사람과 성공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이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강점과 약점이 있었다. 훌륭한 판단과 어리석은 선택이 함께 존재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성공한 사람을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사람을 사람의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동시에 스스로를 지나치게 낮추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뒤에 있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뒤처진 것도 아니다. 앞선 사람에게는 그가 받은 조건과 기회가 있었고, 내가 살아온 길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경험과 배움이 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합리화하고, 성공을 능력으로만 설명하며, 타인의 화려한 모습을 그 사람 전체로 착각한다. 그럼에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도움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의 삶을 하나의 기준으로 단정하지 않는 것이다.

 

높은 곳에 오른 사람도 같은 인간이다. 아직 그곳에 오르지 못한 사람도 부족한 인간이 아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게 된다. 동시에 자신을 함부로 포기하지도 않게 된다. 그리고 성공보다 더 어려운 능력,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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