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나보다 남을 먼저 보는 데 써 왔다는 것이다.
사소한 장면들부터 그랬다. 함께 밥을 먹으러 가면, 메뉴판은 늘 형식적인 존재였다. 모두가 짜장면을 시키면, 나는 굳이 내 입맛을 확인해 보지 않았다. 볶음밥이 더 먹고 싶어도, 냉면이 당겨도, “저도 짜장면이요”라는 말은 너무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왔다.
‘괜히 혼자 다르게 시켜서 분위기를 깨면 어쩌지.’
그 한 줄기 생각이 늘 나를 조용한 다수의 편으로 밀어 넣었다.
돌아보면, 그 배경에는 오래된 공기가 깔려 있다.
전체의 조화를 위해 개인은 조금쯤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던 시절.
집안에서는 장남이니까 참고, 양보하고, 먼저 나서는 대신 뒤에서 맞추는 것이 미덕이라고 들으며 자랐다.
다들 예라고 할 때, 나 혼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버릇없음이자 무례였다.
그렇게 나는 ‘내 생각’보다 ‘모두의 생각’에 몸을 맞추는 법을 먼저 배웠다.
경제 성장기의 그 뜨거운 속도를 통과하면서, 나는 또 다른 장면들을 목격했다.
다리가 무너졌고, 백화점이 무너졌고, 지하철이 불길에 휩싸였다.
뉴스 속 참사가 아니라, 내 삶의 언저리를 직접 찢고 지나간 사건들이었다.
대학교 시절, 환하게 웃던 한 친구를 대구 지하철 사고로 떠나보내기도 했다.
사진 속의 웃는 얼굴은 그대로인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어느 날, 비슷한 상황을 재현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객실 안으로 불길한 연기가 천천히 스며들어 오는데도, 사람들은 어색한 침묵 속에 그대로 앉아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것 같다”고 말하면 될 것 같지만, 아무도 선뜻 입을 떼지 못한다.
실험 참가자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주변을 훑어볼 뿐, 손을 들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혹시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건 아닐까.’
‘내가 먼저 나섰다가 민폐가 되면 어떡하지.’
그 주저함의 정체가, 어쩐지 너무 익숙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나서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공기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 다수와 다른 선택을 하는 일, 조용한 방 안에서 처음으로 손을 드는 일 같은 것들.
그 모든 것을 나는, 어쩐지 위험하고 불필요한 행동처럼 여겨왔다.
그래서였을까.
‘이기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기대가 아니라 걱정이었다.
혹시 내 욕심 때문에 누군가가 다치지는 않을까.
내 선택 때문에 주변에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닐까.
이기적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쁜 사람, 무례한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의 이름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쉰이라는 숫자 앞에 서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위해 얼마나 이기적이었을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허락해 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음식이 진짜 입에 맞는지,
어떤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어떤 시간의 속도가 나와 잘 맞는지,
그 기본적인 질문들을 나는 오래 미뤄 왔다.
사춘기나 20대 초반에 했어야 할 고민이 이제야 밀려온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때의 나는 주변의 기대와 역할에 맞추는 데 바빴다.
좋은 아들, 성실한 직원, 무리 없이 섞이는 동료, 크게 튀지 않는 사회 구성원.
그 속에서 ‘나’는 늘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어느 정도 안정된 경제적 기반, 당장 생계를 위협하는 큰 걱정은 없는 나이.
이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조용히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내 마음이 덜 비어 있을까.’
그 질문들 앞에서, 나는 조금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아침 수영은 그 변화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처음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 몸보다 타인의 시선을 더 의식했다.
어떤 수영복을 입어야 덜 민망할지,
배가 얼마나 나와 보일지,
팔을 저을 때 동작이 서툴러 보이지는 않을지,
심지어 샤워를 하는 자세까지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며 불편해했다.
그런데 물속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외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 더 바쁘다는 것이다.
나는 수영장이 끝난 후, 다른 사람의 몸매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수영복을 입고 있었는지, 스트로크가 정확했는지, 솔직히 떠오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나를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고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이 가장 큰 관심사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수영장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몸인지, 어떤 수영복을 입었는지,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자세가 얼마나 완벽한지에 집착하기보다,
오늘의 호흡, 오늘의 리듬에 집중하게 되었다.
운동에 진심을 다하는 것이,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며 불안해하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이상한 순서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남들의 시선과 생각에는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 왔으면서,
정작 내 몸과 건강, 내 마음과 안녕에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피곤해도 조금만 더, 아파도 괜찮은 척, 힘들어도 참고 버티는 것을 성실함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존재는 결국 ‘나’다.
내 몸이 무너지면, 내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도 함께 흔들린다.
내 마음이 닳아버리면, 아무리 좋은 말도, 아무리 친절한 행동도 껍데기만 남는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에너지는 분명히 제한적이다.
그 에너지를 전부 남을 위해 쓰고 나서야 비로소 내 차례를 기다리는 삶은, 더 이상 유지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는, 가능한 한 나 자신에게 이기적이 되기로.
여기서 말하는 이기심은 남을 무시하고 짓밟는 이기심이 아니다.
대중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타인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나 자신을 우선순위에 올려 두는 태도에 가깝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떠안지 않는 용기.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결심.
몸이 힘들면 쉬어갈 줄 아는 주체성.
관계 속에서 내 감정도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함.
이 모든 것이 건강한 의미의 이기심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늘 이타적인 사람으로 보이려 애쓰며 사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다.
나를 소모시키면서까지 남에게 맞추는 삶은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언젠가 타인에게도 제대로된 배려를 건네기 어렵다.
쉰 살에 이르러, 나는 마침내 인생의 무게를 조금씩 나에게로 옮기고 있다.
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선택하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이제는 내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조금 더 신뢰해 보려고 한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걷는 길.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밀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들.
그 속에서 나는 늦게 배운 한 문장을 조용히 되뇌게 된다.
Be selfish of yourself.

'글쓰기: 책, 생각,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을 쓰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30) | 2025.11.20 |
|---|---|
| 불광불급, 온전히 몰입하는 삶의 순간 (20) | 2025.11.16 |
| 성장은 계단처럼 온다 (13) | 2025.11.15 |
| 가을 예찬 (5) | 2025.11.09 |
| 조언하지 않는다 (22) | 2025.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