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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책, 생각, 에세이

아무 일 없는 하루의 소중함

by Heedong-Kim 2025. 10. 23.

 

어떤 날은 그냥 흘러간다.

별다른 일도 없고,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도 없다.

그저 눈을 뜨고 출근하고, 일하고, 밥을 먹고, 퇴근하고, 씻고 잠드는 하루.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지루하고, 너무 평범해서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하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아무 일 없는 하루’야말로 얼마나 귀한가.

큰일이 없고, 큰 걱정이 없다는 건, 그 자체로 삶이 조용히 잘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 평범함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 애써 찾던 행복의 또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이 짧은 문장은 매일의 의미를 단단하게 붙잡아준다. 우리가 아무 일 없는 하루를 지루하게 여기며 흘려보내는 동안, 누군가는 그 하루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냥 그런 날’은 없다. 살아있고, 숨 쉬고, 밥을 먹고, 누군가의 안부를 듣는 오늘,

그 자체로 이미 기적 같은 하루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평균’이라는 허상에 쫓긴다.

보통의 삶, 평균적인 행복, 남들만큼의 성취. 이 모든 말들이 마치 기준인 듯 우리를 옭아맨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 할 것 같고, 이 정도는 해줘야 정상인 것 같고, 남의 시선 속에서 나의 하루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평가한다.

 

그 결과, 우리는 늘 피곤하다.

해야만 하는 일들로 하루를 가득 채우고, 놓치면 안 된다는 불안감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그렇게 사는 게 어른의 삶이고, 사회인의 책임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그 모든 ‘평균’과 ‘보통’이라는 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저자 토드 로즈는 이렇게 말했다.


“평균적인 두뇌도, 평균적인 발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완벽히 ‘보통’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과거의 우량아 선발대회나 미인대회처럼 ‘평균’이라는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조금 통통한 아이, 조금 마른 아이, 그저 다를 뿐이지 잘못된 것도, 부족한 것도 아니다.

각자의 환경, 식성, 성격, 재능이 다를 뿐이다. 그 다양함이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평균이라는 허상을 좇는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하루를 쪼개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평균’은 실체 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를 붙잡으려다 정작 빛을 놓치는 게 우리 삶의 아이러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무 일 없는 하루를 귀하게 여긴다.

설사 그날 아무 성과가 없었더라도,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그저 ‘무사히’ 오늘을 살아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아무 일 없는 하루는 ‘비어 있는 하루’가 아니라, ‘충분히 존재한 하루’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음악도 끄고, 그저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그때 비로소 들린다.

시계 초침의 소리, 바람의 숨결, 내 호흡의 리듬.

그 조용한 순간들이야말로 삶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진짜 시간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생산성’을 기준으로 하루의 가치를 매긴다.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성과를 냈는가, 그런 숫자와 기록으로 하루를 재단한다.

하지만 아무 일 없는 하루는, 그 모든 계산에서 벗어나 있는 자유의 시간이다.

아무도 평가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그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

 

그 하루를 견디고, 또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삶의 자세다.

‘비움’은 게으름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위한 여백이니까.

 

우리는 인생의 절정만 기억하려고 한다.

성공의 순간, 여행의 설렘, 사랑의 불꽃.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그 절정이 아닌 평지 위에서 흘러간다.

그 평범한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단단해지고, 소리 없는 성장의 뿌리를 내린다.

아무 일 없는 하루야말로, 우리의 내면을 다시 세우는 ‘조용한 작업실’ 같은 공간이다.

 

저녁이 되어 하루를 마무리할 때,  문득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최고의 하루일지 모른다.

사고도 없고, 아픔도 없고, 그저 평온하게 흘러간 하루라면 말이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 아무 일 없는 이 하루가 더욱 소중하다.

그 평범함 속에 숨겨진 기적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행복의 문턱을 넘어선 사람이다.

 

결국, 아무 일 없는 하루는 아무 의미 없는 하루가 아니다.

그건 내 삶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잘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다.

평균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나만의 속도와 리듬으로 살아가는 하루.

그 하루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낀다.

 

그렇다.

오늘도 아무 일 없기를,

그게 나의 가장 진심 어린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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