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디에서 출발했고, 지금은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젊었을 때는 이런 질문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저 앞에 놓인 일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고, 조금 더 빨리 배우고,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면 언젠가는 좋은 곳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었다.
나의 첫 직장은 LG전자 연구소였다. 전자공학을 공부했고 RF 회로를 설계했다. 하루 종일 회로를 보고, 측정하고, 데이터를 들여다봤다.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이유를 찾아야 했다. 부품 하나를 바꿔보고, 조건을 바꿔보고, 다시 측정했다.
문제가 풀리는 순간에는 묘한 기쁨이 있었다.
보이지 않던 원인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복잡했던 현상이 하나의 논리로 설명되는 순간.
그때의 나는 좋은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기술을 잘 아는 사람. 남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외국계 계측기 회사로 옮겼다. 여전히 기술을 다루었지만 세상은 조금 달라졌다. 연구소 안에서 제품을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 여러 고객을 만나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회사의 엔지니어들이 서로 다른 문제를 들고 왔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측정 시스템을 구성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정체성은 분명했다.
나는 엔지니어였다. 기술을 잘 이해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업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꽤 낯설었다. 기술적으로 옳은 것을 설명하는 일과 고객이 실제로 선택하도록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달랐다. 엔지니어일 때는 정답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영업에서는 정답만으로는 부족했다.
고객에게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다. 예산이 있었고, 일정이 있었고, 조직 내부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기술적으로 가장 좋은 제품이 언제나 선택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조금 이상했다. 좋은 제품이면 선택되어야 하고, 좋은 기술이면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객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사람은 기술만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제품을 선택하는 것 역시 결국 사람의 일이다.
고객이 무엇을 말하는지보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를 이해해야 했다. 그때 처음 기술 너머의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마케팅을 맡게 되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영업에서는 눈앞의 고객을 바라봤다면, 마케팅에서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시장 전체를 바라봐야 했다.
어떤 기술이 앞으로 중요해질 것인지.
어느 산업에서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인지.
고객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 고객이 귀를 기울일 것인지.
행사를 만들고, 콘텐츠를 만들고, 고객을 초청했다. 한국 시장뿐 아니라 일본과 동남아시아, 호주를 함께 바라보게 되었고 미국과 유럽, 중국의 동료들과 같은 시장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연구개발에서 영업으로, 영업에서 마케팅으로 꽤 먼 길을 와 있었다. 때로는 내가 처음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잊을 만큼.
그런데 얼마 전 일을 네 가지로 나누는 방법을 보았다.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고 나도 잘하는 일.
나만 할 수 있고 내가 잘하는 일.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잘하지 못하는 일.
그리고 나만 할 수 있지만 아직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

처음에는 단순한 분류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동안 그 네 개의 칸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지난 시간이 겹쳐 보였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잘해왔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 잘하고 있는 일 가운데 정말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직장에서는 잘하는 사람이 계속 같은 일을 맡게 된다. 일을 잘 정리하는 사람에게는 정리할 일이 몰린다.
발표를 잘하는 사람은 늘 발표를 맡는다.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에게는 늘 어려운 문제가 온다.
행사를 잘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행사도 맡겨진다.
“지난번에도 잘했으니까 이번에도 부탁합니다.”
직장에서 참 자주 듣는 말이다. 처음에는 인정처럼 느껴진다. 나를 믿는다는 뜻 같아서 기분도 좋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조금 다르게 들릴 때가 있다.
‘나는 잘한다는 이유로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하는 것과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이 사실을 나는 꽤 늦게 알았다. 내가 한 시간 만에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은 두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언제까지나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력이 쌓일수록 이런 일에서 조금씩 빠져나와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알려주고, 맡기고, 기다려주는 것.
그래야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잘하는 일을 내려놓는 것을 두려워한다.
잘하는 일은 안전하기 때문이다. 실패할 가능성이 작다. 주변의 인정도 빠르다.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쉽다.
“나는 이것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 문장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하지만 커리어가 길어질수록 그 안정감이 오히려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내가 잘하는 일을 십 년 뒤에도 잘한다고 해서 십 년 뒤의 내가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잘하는 것’보다 ‘나만이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한다.
예전에는 강점이라고 하면 하나의 뛰어난 능력을 떠올렸다.
기술을 잘하거나.
영어를 잘하거나.
영업을 잘하거나.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것.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경력이 쌓일수록 경쟁력은 하나의 능력보다 여러 경험이 겹쳐지는 곳에서 생기는 것 같다.
기술을 아는 사람은 많다.
영업을 잘하는 사람도 많다.
마케팅을 잘하는 사람도 많다.
고객을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도 많다.
하지만 기술개발을 해보고, 고객을 만나 영업을 해보고, 다시 시장 전체를 바라보는 마케팅을 경험한 사람은 조금 줄어든다.
여기에 여러 나라의 시장을 경험하고, 글로벌 조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본 시간이 더해진다.
하나하나는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한 사람 안에서 만나는 순간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아마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이런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과 경험이 겹치는 지점에서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가치를 만드는 것.
생각해 보면 연구개발을 할 때 배운 것은 RF 회로 설계만이 아니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현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다.
가설을 세우고, 확인하고, 원인을 좁혀가는 방식.
영업에서는 사람을 배웠다.
고객이 하는 말과 고객이 정말 원하는 것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케팅에서는 연결하는 법을 배웠다.
기술을 시장의 언어로 바꾸고, 시장의 변화를 고객에게 필요한 이야기로 만드는 일.
나는 직무를 바꿀 때마다 이전의 일을 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버린 것은 별로 없었다.
모두 어디엔가 남아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점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것을 배울 때도 예전과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요즘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AI다. 처음에는 또다시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도구가 계속 나오고,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바뀐다.
모든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코딩도 해야 할 것 같고, 데이터 분석도 더 깊게 배워야 할 것 같고, 새로운 AI 도구도 끊임없이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을 바꾸었다.
‘AI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나보다 훨씬 빠르게 배우는 사람도 많고, AI 자체를 훨씬 깊이 이해하는 사람도 많다.
내가 그들과 같은 길에서 경쟁해야 할 이유는 없다.
대신 이런 질문이 생겼다.
‘내가 살아온 경험에 AI가 더해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술을 알고, 고객을 알고, 영업 현장을 알고, 마케팅을 알고, 여러 나라의 시장을 경험한 사람이 AI를 활용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시장 정보를 더 빠르게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흩어진 고객의 목소리에서 패턴을 찾아낼 수도 있다. 복잡한 기술을 더 빠르게 고객의 언어로 바꿀 수도 있다. 수많은 데이터를 통해 아직 보이지 않던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 순간 AI는 새로운 직업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경험을 증폭하는 도구가 된다.
아마 이것이 네 번째 칸일 것이다.
나만 할 수 있지만 아직 잘하지 못하는 일. 나는 이 영역이 조금 두렵다.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일을 해오면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미 잘하는 일이 있고,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있다.
다시 초보자가 되는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의 커리어는 늘 그 불편함을 지나왔다.
엔지니어였을 때 영업은 낯선 일이었다. 처음 고객을 만나 비즈니스를 만드는 것은 잘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내 경험의 일부가 되었다. 영업을 할 때 마케팅도 낯설었다.
시장 전체를 보고 메시지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일은 처음에는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험이 나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서툰 것도 언젠가는 나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오늘의 4번이 내일의 2번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커리어의 성장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잘하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고,
시간을 들여 조금씩 익숙해지고, 결국 그것을 나만의 강점으로 만든 뒤, 다시 다음 낯선 곳을 바라보는 것.
젊었을 때는 다음 직책이 중요했다.
승진을 하고 싶었고, 더 좋은 역할을 맡고 싶었다.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직책보다 조금 다른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회사에서 어떤 직함을 갖게 될지는 내가 완전히 결정할 수 없다.
조직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고, 기회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험을 연결하고 무엇을 새롭게 배울 것인지는 상당 부분 내가 정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질문을 더 자주 한다.
‘5년 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할까.’
행사를 잘 운영하기 때문일까. 보고서를 빨리 만들기 때문일까. 회사의 프로세스를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것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아쉽다.
나는 기술과 시장을 연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객이 말하기 전에 변화의 방향을 읽고, 새로운 기술을 내가 살아온 경험과 연결하고, 흩어진 정보 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기회를 찾아내는 사람. 그런 역할이라면 내가 지나온 길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낄 것 같다.
연구개발도,
영업도,
마케팅도,
서로 상관없는 길을 돌아온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커리어 후반부가 되면 선택지가 줄어든다고 말한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젊었을 때는 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는 무엇을 더할 것인지보다 무엇을 연결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무엇을 더 잘할 것인지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지가 중요하다.
모든 일을 잘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달릴 필요도 없다.
내가 잘하지만 다른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씩 내려놓아도 된다.
남들이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따라가던 일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워져도 된다.
그 대신 지금까지 내가 지나온 길을 오래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배운 것.
실패한 것.
잘했던 것.
서툴렀던 것.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내 안에 무엇을 남겼는지.
아마 그 모든 것이 겹쳐지는 곳에 나만의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질문을 해보려 한다.
나는 지금 잘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잘하는 일을 내려놓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 일을 통해 인정받아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설명하는 익숙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에 쥔 것을 조금 놓아야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다.
어쩌면 긴 직장생활의 후반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많은 것을 잘하려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그 시간 속에 이미 숨어 있는 나만의 조합을 발견하고, 앞으로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일.
그러고 보면 커리어의 후반부에는 질문 하나만 바꾸어도 되는 것 같다.
‘나는 무엇을 더 잘해야 할까.’
그보다 먼저,
‘나는 무엇에 남은 시간을 쓰고 싶은가.’
그리고 그 질문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결국 한 문장이 남는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
지금 잘하고 있다면 더 깊게 만들고, 아직 잘하지 못한다면 천천히 배워가면 된다.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는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보다, 내가 걸어온 길이 결국 나만의 길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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